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알아보자
한국의 경제는 1960년대 초부터 고도성장을 개시하였다.
1962년 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은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1963년 9.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이후 해마다 약간의 증감은 있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이전까지 연평균 9%를 뛰어넘는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하여 전형적인 농업 후진국이 공업, 서비스업, 금융업 등 다양한 산업이 고루 발달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상전벽해의 변화가 이루어져 한 세대만에 라디오 보급사회에서 마이카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는 세계경제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단히 성공적인 성과였다.
이 같은 과정은 정부가 큰 틀에서의 계획을 구상하여 자본을 조달하고 산업과 기업을 육성한 경제개발 계획을 실천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1958~1959년 1년 8개월 동안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을 구상하여 자립경제의 노선 추구, 차관 도입, 대일국교정상화를 통한 한일경제협력등의 수단과 공업화에 따른 총량적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단순 방식과 수단에 지나지 않던 경제 계획에서 국내 최초로 체계적인 경제 계획안을 작성했으나 4.19 혁명으로 인해 미처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돼 노태우 정부까지 이어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첫 출발점인 제1차 경제 개발 계획의 시안은 4.19 혁명 이후 출범한 경제제일주의를 국시로 삼은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민주당 신파, 장면 내각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 주도로 설계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토대로 공업화라는 목표 아래 경제학자, 민간 기업인, 미국 측 경제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자립경제의 노선 추구, 차관 도입, 대일국교정상화를 통한 한일경제협력은 이전 이승만 정부의 계획과 동일했으나, 불균형 발전 전략이 최초로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전과 같이 대미원조에 의존적인 내수 위주의 공업화에 따른 계획의 틀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계획안 또한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는데, 5.16으로 박정희를 위시로 한 군부가 권력을 탈취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후 50년대 초부터 계획만 무성했고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했던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 정부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렇게 박정희 정부는 1961년 5월 12일, 제1차 경제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과 장면 내각의 시안에서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였으나, 몇 가지 차이가 존재했다.
이전보다 중투자와 1차 생산품의 수출 진흥에 더욱 비중을 두어, 종합제철소 건설 및 관련 대규모 인프라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으며, 또 단순히 무역불균형 해소가 아닌 이로 인한 개발에 필요한 외자의 동원을 기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출의 진흥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당시 경제 개발 계획 예산 마련을 위해 막대한 내자 동원이 필요했기에 1962년 6월, 미국 경제고문단의 의견을 무시하고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 과정에 있어 미국과 마찰이 생겨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종합제철소 계획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곧바로 백지화 되었으나, 이후 제2차 계획부터 국내외적 반발 속에서도 다시 추진되어 건설되었고,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쳐 한국 철강산업의 메카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1963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경공업 공산품 수출 진흥으로 수출제일주의를 통해 활로를 찾은 박정희 정부는 1964년 1월, 수출주도전략을 중점으로 한 새로운 보완 계획안을 발표하였고, 제1차 경제 개발 계획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당시 7.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목표치 5%를 초과하였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에서 $126로 증가하였다.
2차 계획(1967~1971)부터는 1차 계획의 성공을 바탕으로 쌓인 데이터로 보다 전문적인 기법이 도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강조되면서 국가 차원의 중화학 인프라 투자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으로 1차 개발 계획 당시 미국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던 포스코의 건설이 추진되었고, 미국은 경제적 실효성을 근거로 차관 제공을 불허했으나 결국 대일청구금으로 외자를 대체해 건립하였다.
3차 계획(1972~1976)부터는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으며, 1, 2차 계획의 연이은 성공으로 재정자립이 가능해졌고,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철수 통보로 한미관계가 악화되면서 대한민국은 이때부터 미국의 자문 없이 독단적으로 경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베트남 철수와 닉슨 독트린에 의한 안보 위기,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인한 유가 급등이 일으킨 전세계 경제 불황 속에서도 수출 수입의 급증과 중동 건설 등으로 위기를 극복했고, 그리하여 목표치를 초과한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한 최초로 외신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북한과 본격적으로 경제 분야에서 큰 차이를 벌리게 된 것도 이 시점이며, 또 1977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일본에 이어 수출액 100억 달러를 돌파한 나라가 된다.
제4차 계획(1977~1981)부터는 교육, 사회 복지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면서 <경제 사회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후 신군부가 집권한 5차(1982~1986)와 6차(1987~1991)는 <경제 사회 발전 5개년 계획>으로 불렸으며, 1992년 시작된 7차 계획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신경제 5개년계획(1993~1997)으로 이어졌다. 관련설명 파일다운로드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그리고 기록으로 보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참고하면 좋다.
이러한 부류의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N개년 계획은 1920년대 구소련이 최초로 강력한 중화학공업화를 내걸면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국제적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1930년대 일본제국이 전쟁 수행을 위해 만주의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괴뢰국가 만주국에서 소련을 모방한 산업개발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전후 일본에서 다시 살아났고, 한국과 대만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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